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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평대군견문록

삼평대군견문록 · 원장의 시선 #1 — 한의원의 진짜 자산은 원장님 머릿속에 있습니다

암묵지를 명시화하는 것이 경영의 시작

2025년 4월 1일

삼평대군견문록 · 원장의 시선 #1 — 한의원의 진짜 자산은 원장님 머릿속에 있습니다

한의원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 뭘까요?

시설? 장비? 입지? 물론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면, 한의원의 거의 모든 것은 원장님 한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떤 환자에게 어떤 치료를 선택할지. 초진 환자를 어떻게 응대할지. 재진 주기를 어떻게 잡을지. 직원에게 뭘 어디까지 맡길지. 비급여 상담을 어떤 식으로 풀어갈지. 이런 판단들은 매뉴얼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원장님이 수년간 쌓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것들이죠.

경영학에서는 이걸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부릅니다.

암묵지 — 시스템에 담기지 않는 지식

얼마 전에 영상 하나를 봤는데, 보면서 계속 우리 한의원 생각이 났습니다.

까칠한AI라는 채널을 운영하는 황현태 대표가 "엔터프라이즈 AX(AI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7분짜리 영상입니다. 대기업이 AI를 도입하려고 할 때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하는 내용인데, 핵심은 이겁니다.

기업 업무의 절반 이상이 공식 시스템에 담겨 있지 않다.

ERP 같은 시스템이 커버하는 건 "메인 가지" — 정형화된 핵심 프로세스뿐이고, 실제 현장에서 일이 돌아가게 만드는 수많은 "잔가지"는 사람들 머릿속, 엑셀 파일, 메모, 구전 노하우에 흩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의원이 떠올랐습니다.

한의원은 암묵지의 극단적 케이스입니다

대기업은 그래도 암묵지가 여러 팀장, 여러 부서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한의원은 다릅니다. 원장님 한 분이 거의 100%를 들고 있습니다.

EMR에 진료 기록은 남지만, 그 기록 뒤에 있는 판단의 맥락 — "이 환자는 왜 이 처방을 선택했는지", "이 증상 조합에서 왜 이쪽을 먼저 봤는지" — 이런 건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약이 몰리는 시간대의 조정 노하우, 신환 상담에서 신뢰를 만드는 자기만의 방식, 계절별 마케팅 감각. 이 모든 게 원장님 머릿속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한의원은 원장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의원의 소프트웨어가 곧 원장님이니까요.

AI 교육만으로는 안 됩니다

저도 AIMO에서 원장님들 대상으로 AI 활용 강의를 해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편차가 큽니다.

챗GPT와 대화하는 법을 알려드리는 것만으로는 실제 업무에 녹아들기가 어렵습니다. 배운 건 알겠는데 막상 진료실에 돌아가면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황현태 대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전사 AI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자산화가 안 된다"는 점이라고요. 개인이 AI를 잘 쓰게 되더라도, 그 역량은 개인에게 귀속됩니다. 조직의 자산으로 남지 않습니다.

한의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장님이 챗GPT를 잘 쓰게 되는 것과, 한의원 운영이 체계적으로 좋아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80점에서 시작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제가 요즘 생각하는 방향은 이렇습니다.

혼자서 AI를 공부해서 실무에 적용하려고 하면, 50점에서 60점으로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한의원 운영에 맞게 설계된 솔루션 위에서 시작하면, 80점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홈페이지 하나를 만드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AI가 원장님께 "우리 한의원이 어떤 환자를 잘 보시나요?", "어떤 치료를 주력으로 하시나요?"라고 물어보고, 그 답변을 바탕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어준다고 해봅시다.

원장님은 홈페이지를 얻은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원장님의 진료 철학, 타깃 환자군, 강점 — 이런 암묵지가 처음으로 구조화된 겁니다.

이게 작은 차이 같아 보이지만, 황현태 대표가 말하는 "데이터베이스 레이어"의 시작점이 됩니다. 정형화된 차트 데이터 말고, 원장님만의 판단과 철학이 담긴 지식 레이어요.

쌓이면, AI가 센싱합니다

이렇게 쌓인 데이터가 일정량을 넘으면, 그때부터는 AI가 패턴을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이 원장님은 소화기 환자에게 이런 접근을 자주 하신다." "신환 상담에서 이 포인트를 강조하시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에 이런 마케팅이 효과적이었다." — 이런 것들은 데이터가 쌓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입니다.

원장님이 의식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솔루션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데이터 속에 이미 담겨 있는 겁니다. AI는 그걸 읽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황현태 대표는 이걸 "컨텍스트 그래프"라고 부릅니다. 회사 고유의 업무 역사, 노하우, 판단 기준이 담긴 지식 구조체. 이게 쌓이면 그 기업만의 진짜 경쟁력, 즉 해자(moat)가 된다고요.

한의원 버전으로 바꿔 말하면: 원장님의 진료 경험과 경영 노하우가 디지털 자산이 되는 것. 원장님이 은퇴하시더라도, 축적된 그 지식은 한의원에 남는 구조입니다.

제가 요즘 시도하고 있는 것

당장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일단 제 한의원 운영에서 가능한 한 많은 판단을 AI를 통해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케팅 문구를 쓸 때, 환자 응대 메시지를 다듬을 때, 운영 관련 의사결정을 정리할 때. 직접 하면 더 빠른 것도 일부러 AI에게 맡겨봅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가진 기준과 판단이 자연스럽게 기록되거든요.

아직은 완벽한 시스템은 아닙니다. 하지만 방향이 맞다는 확신은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도구를 쓰는 것보다, 그 도구를 통해 내 노하우가 쌓이는 구조를 만드는 게 핵심이라는 점. 이건 직접 해보면서 느낀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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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엔터프라이즈 AX, '암묵지'에 답이 있습니다 — 까칠한AI (황현태)
https://youtu.be/6BDUBtwQpD8

7분짜리 짧은 영상입니다. "대기업 AI 전환" 이야기지만, 한의원에 대입해서 보시면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집니다. 특히 "조직의 꼭짓점을 먼저 타격한다"는 부분 — 한의원에서는 그 꼭짓점이 바로 원장님 자신이라는 점에서, 더 직접적으로 와닿으실 겁니다.

삼평대군견문록 — 원장의 시선